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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美‘, ‘여성과 문화'와 관련한 본연의 생각을 나눕니다.

첫번째 <제국의 아이돌> 최승희, 댄서의 불시착

저자
이혜진
등록일
2020.04.02
조회수
600

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여성 예술가 첫 번째 제국의 아이돌 최승희, 댄서의 불시착 이 콘텐츠는 아모레퍼시픽재단의 지원으로 출판된 제국의 아이돌(저자: 이혜진) 에서 발췌 요약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대중의 호감을 이끄는 스타의 이미지 전이는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이른바 ‘제국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 예술가 최승희, 리샹란, 레니 리펜슈탈,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삶의 과정을 되돌아 봄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문화 권력 속에 놓인 한 개인의 딜레마, 그리고 소비사회의 기만성과 대중의 공통 감각 등 우리 삶의 현재적인 맥락에서 반추해야 할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이사도라 던컨'으로 불린 무용가 최승희 제국 일본의 무희로서 당대 명성을 떨쳤지만 ‘대동아 공영’을 위한 프로파 간다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전후 친일 혐의를 받고 월북하다. 하지만 이후 북한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로’로 다시 서다. ‘조선의 이사도라 던컨’이라 불리던 댄서 최승희는 최초의 한류스타였습니다. 16세의 나이에 일본 신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간 최승희는 중국 정치가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존 스타인벡,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로맹 롤랑, 장 콕토,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수많은 예술인들의 뮤즈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무용계의 여왕이자 톱스타였던 최승희였지만 정작 그녀의 나라에서는 봉건적 조선사회 풍속으로 인해 기생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사후 견해의 한 가지일 뿐 최승희를 바라 보는 관점과 가치는 시대와 정치의 속박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습니다. 1929년 9월 18일 독자적 예술에 대한 소망을 품고 스승을 떠나 조선에 돌아온 최승희는 남산 기슭에 ‘최승희 무용예술 연구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현대무용이 뿌리내리기에 봉건적 조선사회 풍속은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악성 루머에 시달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곤란한 형편에서 1931년 5월, 안막과 결혼한 그녀는 남편의 절대적인 후원으로 자신의 무용예술에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동안 오빠 최승일의 공연기획에 따라 스승을 모방한 춤과 그녀 자신이 새롭게 창작한 현대무용을 무대에 올렸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조선적인 것’ 혹은 민족 정서를 현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선명한 조선적 정체성과 조선민족을 대변하는 예술가로서의 독립적 위상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무용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당시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따라야만 했고 그 탓에 대중의 시선은 최승희 무용 그 자체를 조선민족 고유의 전유물로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최승희의 전략은 ‘인터내셔널 예술가’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공연 중 최승희의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민족명 표기란에 ‘Korean’ 또는 ‘Chosenese’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언론은 그녀를 ‘코리언 댄서’ 때로는 ‘재패니즈 댄서’라고 소개했습니다.  최승희는 명백한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식민지 조선이 제국 일본의 한 지역이라는 인식 때문에 이른바 ‘제국의 무희’ 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대동아공영’ 선전•홍보에 복무하는 순회공연과 황군 위문공연을 하고 국방헌금을 냈다는 이유로 해방 이후 현재까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프로파간다 어떤 이념이나 사고방식 등을 홍보하거나 설득함, 또는 그러한 것들을 주입식 교육을 통해 어느 하나의 철칙으로 여겨진 것들이며, 주로 선전•선동으로 한역된다. 여기서 일컫는 사고방식은 주로 상식적이지 못하거나 무논리가 동반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립국어원은 이를 순화하여 선전, 선동이라고 하였다.(출처: 나무위키) 해방 이후 월북한 최승희는 김일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김일성 중심의 북한 유일체제 확립과 정치체제를 공고화하는 프로파간다를 수행했습니다. 이 시기 그녀의 무용극에는 조선의 전통적 면모를 표방한 민족의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분단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욕망하는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북한 예술인으로서 영광스러운 명예 표창인 ‘인민 배우’였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당 종파주의자’,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문화예술 부분의 불순 분자’로 낙인찍혀 숙청 당했고 m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2년 후 사망했습니다. 정치적 희생자 였던 그녀는 후에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 애국열사릉에 묘가 안치되었고 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그녀의 대표작 <사도성 이야기>가 공연되는 등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이처럼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변화와 함께 파도를 타야만 했습니다. 더불어 남한에서는 그녀의 무용을 ‘친일’ 수단이자 북한 선전물로 치부하고 금기시 하였지만 냉전체제 후에는 그녀를 다시 민족주의자로 복권시켰습니다. 그녀는 무용을 양반의 여흥을 돋우는 천한 것이 아닌 서양의 문명적 예술임을 널리 알린 최초의 전문 무용가였음은 자명합니다. 더욱이 ‘조선적’, ‘동양적’ 무용을 세계적 수준의 예술 장르로 끌어올린 과업은 어떤 미사여구로도 부족합니다. 이처럼 누구도 이루지 못한 최승희 무용예술의 선구적, 독보적 업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도 좋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최승희라는 존재에 대한 논쟁은 과연 그녀가 ‘반도의 무희’였는지 ‘제국의 무희’였는지, 아니면 ‘북한 최고의 예술인’이었는지에만 초점이 모여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구도(제국 일본-식민지 조선-북한 사회주의)가 여전히 그녀의 예술적 평가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삶이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을 비롯하여 북한이라는 국가를 횡단하고 있는 만큼 최승희의 내셔널 아이덴티티 경계선은 매우 미묘합니다. 한국 현대무용의 시초인 최승희는 국적과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 ‘댄서’였습니다.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삶을 남긴 그녀의 정체성은 여전히 ‘불시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 편에서는 만영의 간판 스타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이른바 ‘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여성 예술가들.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 즉 당시 동서양의 제국주의를 경험한 이들이 내셔널리즘과 개인의 아이덴티티, 프로파간다와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는지 혹은 결국 실패했는지를 추적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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