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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美‘, ‘여성과 문화'와 관련한 본연의 생각을 나눕니다.

세번째 <제국의 아이돌> 레니 리펜슈탈, 백 년 동안의 열정

저자
이혜진
등록일
2020.05.22
조회수
715

세 번째 제국의 아이돌 레니 리펜슈탈, 백 년 동안의 열정 [표지사진] ‘불세출의 천재’이면서 ‘나치의 프로파간다’였던 예술가 레니 리펜슈탈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음악적 효과로 압도적인 영상미를 구현하며20세기 최고의 기록영화를 만든 레니는 ‘나치의 헤드 치어리더’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천재 영화감독’으로 경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범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이후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진작가로서 제 2의 인생을 개척한 레니는 101세로 사망할 때까지 나치 혐의를 부인했다. *바그너의 장중한 음악이 흐르며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됩니다. 전용기 한 대가 뭉게구름을 뚫고 뉘른베르크에 착륙하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를 외칩니다. 카퍼레이드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를 보려고 거리에 늘어선 군중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꽃다발을 건넵니다. 1934년 9월 5일부터 14일까지 히틀러의 순찰과 나치당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는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1팡크를 만난 예술가 레니 평화롭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레니는 다소 거칠고 고집이 센 골목대장이기도, 동화 속 상상에 자주 빠져버리는 몽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떤 일이든 정열적으로 추진하고 강인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또한 레니는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무용가, 최고의 우아함과 견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명인’으로 찬사를 받았지만1924년 공연 도중, 치료 불가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후 우연히 아르놀트 팡크의 산악영화 〈운명의 산〉(1923)에 매료되어 일주일 내내 그 영화를 관람했고 그녀 특유의 적극성으로 팡크 감독을 찾아가 영화 제작 참여 의지를 밝혔습니다. 결국 〈성스러운 산〉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한 레니는 ‘진정으로 매력적인 신인, 풍부하고 예리한 표현력을 갖춘 명인이자, 자신의 역할과 완전히 하나가 된 배우’라는 극찬을 받으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 히틀러를 만난 영화 감독 레니 레니는 팡크로부터 독립하여 처음 제작한 영화〈푸른 빛〉(1932)으로 프로듀서, 감독, 촬영, 연기 면에서 호평을 받았고 전 세계적 흥행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 은메달 수상작이 되면서 점차 인지도를 높여갔습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도 이 영화를 보고 레니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레니는 히틀러의 요청으로 나치전당대회를 기록한 〈신념의 승리〉(1933)와 〈의지의 승리〉(1935)를 제작합니다.  당시 나치 치하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90%가 가벼운 오락물이었던 반면, 레니의 영화는 질서정연하게 운집한 수 만명의 단결된 모습을 서사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독일 민중의 통합과 영광을 재현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니의 영화는 단순히 국가에 대한 개인의 충성이나 영웅심으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찬양한 영상 미학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충직한 사람들의 의심 없는 열정 그 자체를 재현하여 독일 민중의 환상을 효과적으로 자극했던 것입니다. 단시간에 실력 있는 ‘히틀러의 나팔수’로 등극하게 된 레니는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올림피아〉(1938)를 제작하였습니다. 이 영화 내용에서는 선전영화의 요소를 발견할 수 없지만 나치가 강조하는 이상적인 아리아인 상으로 간주된 모습, 이를테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관객의 모습이라든가 뛰어난 육체미를 소유한 선수들의 강인함을 통한 의지와 열정의 숭배를 숭고함으로 미학화한 것으로 선전영화 특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레니는 끝까지 베를린 올림픽의 역사적인 행사를 그대로 기록한 다큐멘터리인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구현한 독일 제3제국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신화적 수사 등은 오늘날까지 프로파간다적 성격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전에 전쟁 다큐를 찍으러 간 레니는 독일군이 폴란드 민간인 30여 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을 목격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절규했고 당시 그녀가 찍힌 현장 사진은 평생 동안 레니가 폴란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이용되었습니다. 훗날 전범재판 과정에서 콘스키에에서 찍힌 이 사진을 정밀 검사했지만 레니가 폴란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으며, 오히려 공포에 질린 듯 일그러져 있는 레니의 표정은 그녀를 전범으로 고발한 사람들의 증언보다 그녀의 결백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3 누바족을 만난 사진가 레니 레니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끝내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나치의 부역자라는 낙인은 대중에게서 지워지지 않았고 ‘나치의 헤드 치어리더’, ‘히틀러의 정부’, ‘나치의 마녀’ 등과 같이 독일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별명이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습니다. 패전 독일에서 끝내 영화감독으로 재기하지 못한 레니는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 아프리카 누바족의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를 출간하며 예술계로 복귀하였습니다. 일평생 포기를 몰랐던 그녀는70대 초반의 나이를 50대로 속이고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고 수중 세계 촬영에 몰두하여 사진집 《산호초 정원》(1978)을 출간하였습니다. 수십 년간 지속된 스쿠버다이버 경험은 레니를 열렬한 환경보호주의자로 이끌면서 그린피스 회원으로도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이 100세가 된 2002년에는 신비로운 해저 생태를 그린 45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수중의 인상> 을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레니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음을 공개적으로 자인했지만 그녀의 영화가 히틀러의 제 3제국을 위한 강력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완벽한 나치 선전영화의 모범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용수, 영화배우, 감독, 사진작가, 그리고 스쿠버다이버, 환경보호주의자의 인생을 살았던 레니 리펜슈탈.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예술가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만큼 그녀가 가졌던 집념과 열정에 대한 이중의 평가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 마를레네 디트리히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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