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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美‘, ‘여성과 문화'와 관련한 본연의 생각을 나눕니다.

네번째 <제국의 아이돌> 마를레네 디트리히, 스모킹 슈트 차림의 팜므파탈

저자
이혜진
등록일
2020.06.26
조회수
1,106

네 번째 제국의 아이돌 마를레네 디트리히, 스모킹 슈트 차림의 팜므파탈 [표지사진]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 마를레네 디트리히 독일 출신 여배우로 당대의 섹시 심벌이었으나 히틀러의 제 3제국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연합군을 위한 위문 무대에 오른 마를레네 디트리히.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며 연합군 측의 프로파간다에 적극 협조한 탓에 독일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그녀는 나치 몰락 후에도 그 이미지를 벗지 못했고, 사후 10년이 흐른 뒤에야 독일 명예시민으로 추서됐다. *링컨을 상기시키는 미국식 탑 햇을 삐딱하게 쓰고 남성의 전유물 검은 턱시도를 걸친 최초의 여성은 ‘마를레네 디트리히’입니다. 현대 매니쉬 룩에 큰 영향을 끼친 ‘디트리히 슈트’는 패션 사상 가장 섹시하고 쿨한 스타일로 평가받으며 매우 혁신적인 아이콘으로 통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파리에서는 공공건물, 레스토랑에서 바지를 입은 여자는 출입을 금지당했을 정도였으므로 여성이 남성 슈트를 착용한다는 것은 미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권장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판탈롱 수트 차림에 하얀 담배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독보적인 스타일은 성적 금기에 대한 혁명적 미학을 창조한 동시에 새로운 패션의 전통을 확립했습니다. 1.1901년 베를린 하늘 아래 태어나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종언 이후 영국 에드워드 시대(1901~1910/1914)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문화가 유럽 최대 공업도시로 발전한 독일로 스며들던 당시, 디트리히는 상류계급 출신 아버지와 성공한 상인계급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납니다. 보수적 엄숙주의가 팽배했던 전 시대와 달리 에드워드 시대는 노동자, 여성 등 권력에서 소외된 집단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만큼, 그녀의 집을 방문한 상류층 여성들의 대화에는 세계정세라든가 여성인권운동에 대한 화두가 등장했습니다. 1918년 디트리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바이마르 콘서바토리움에 들어갔지만 심각한 손목 부상으로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전통을 깨고 연극학교에 지원하여 배우가 되기 위한 기초를 쌓아갔습니다. 무성영화 황금기에 돌입한 1922년 무렵부터 베를린 전역에서 수익성을 노린 수많은 영화사가 생겼고 넓은 촬영소만 확보되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기에 그녀 역시 동시에 여러 편의 영화나 연극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나갔습니다. 이 무렵 그녀는 단역을 맡고 있던 한 작품의 조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루돌프 지버와 결혼했습니다. 약 1년 뒤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리아가 태어나고 결혼생활 5년 만에 결별했지만, 남편이 사망하기 전까지 결혼생활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2.1930년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 카메라 아래 다시 태어나다 디트리히와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만남은 영화 역사상으로도 주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약 10여 년간 크고 작은 단역을 맡으며 쌓은 경험과 그녀만의 자유분방한 감각은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히로인이 되기에 적합한 캐릭터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슈테른베르크 감독이 제의한 〈푸른 천사〉의 음란한 여자 배역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감독의 성실하고 진지한 열정에 매료되어, 그녀 스스로도 정열적으로 촬영에 임했습니다. 당시 여배우 맨다리를 그대로 영화 포스터에 사용한 사례는 최초였는데, 이러한 디트리히의 이상적인 관능미와 뻔뻔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감각은 유럽 대중의  감수성을 완벽히 저격했고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엄청난 흥행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또한 영화사적으로도 독일 토키 영화의 새로운 길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미장센과 음향 효과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토키(talkie) 영화 영사(映寫)할 때 영상(映像)과 동시에 음성·음악 등이 나오는 영화의 총칭으로 사일런트(無聲)에 대칭되는 말이며, 영화가 모두 토키로 제작되면서부터 이 말은 잘 쓰지 않게 되었다. 1889년 미국의 에디슨이 납관식(蠟管式) 축음기를 사용한 것이 토키의 효시다. 1910년, 프랑스의 로스트가 필름의 나비 반쪽에 소리를 녹음한 필름식(式)을 발명하였다. 촬영에 맞추어 레코드에 소리를 녹음하여 재생하는 레코드식이 한때 성행하기도 하였으나 필름식이 점차 우세하게 되어 현재는 모두 이 방식을 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푸른 천사〉가 독일에서 크게 흥행하자 미국의 주요 영화배급사인 파라마운트사가 디트리히와의 계약을 제안해왔습니다. 디트리히는 할리우드 진출에 그다지 큰 기대나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남편 조언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단번에 인기를 끌어 모았습니다. 1930년, 그렇게 디트리히는 할리우드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디트리히가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마자 파라마운트사는 그녀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촬영 과정에서 필요한 분장실 소품이나 연출 방법, 조명 위치, 스태프들의 매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슈테른베르크의 방식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할리우드 대스타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것이었습니다.  3.1939년 미국으로의 망명 후 2002년 독일 명예시민이 되다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을 거부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디트리히는 전쟁터의 용감한 엔터테이너로서 미연방정부와 협력해 미군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위문공연과 병원 근무를 섰으며, 그 어떤 스타들보다 전쟁 채권을 많이 팔았던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해외 주둔 미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시민으로서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최초 여성이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문화 공로자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인 ‘프랑스 명예군단훈장’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디트리히가 히틀러의 제3제국은 부정했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공인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패전 독일 국민에게는 조국을 등진 배신자로 낙인 찍혔던 디트리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베를린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할리우드 은퇴를 선언한 이후 그녀는 파리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자처하던 끝에 1992년 5월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디트리히가 사망한 지 10년이 흐른 2002년 독일 정부는 그녀를 ‘독일 명예시민’으로 추서하고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그녀의 고향 쇤네베르크에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을 조성하는가 하면 생전 바람대로 그녀의 묘지를 베를린으로 이장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책임과 나치의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반성과 함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내부 성찰 일환으로서 미래 평화와 민주주의 달성에 기여할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반나치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했던 디트리히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으로 선회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평가는 그녀가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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