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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 법학 > 기타법학북한 형법의 여성상 ― 성범죄를 중심으로 ―

학술지명
법학연구
저자
김정환
연도
2024
발행기관
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
북한 정권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여성 관련 법률을 제정하면서 여성 정책을 시행해 왔다. 1945년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추진하면서 남녀평등을 국가체제의 핵심 가치의 하나로 삼고, ‘부녀자’라는 호칭을 ‘여성’이라고 변경하여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재구성하고 여성을 위한 법률들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점차 여성에게 가정에서의 헌신과 사회적 희생이 강조되었는데, 북한에서 사회주의 집단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남녀평등을 강조하면서도 북한 사회의 전통적 가부장제 질서는 존중되고 유지되었다. 1950년 제정된 북한 형법에서 추구된 여성상은 남녀평등의 추구보다는 가부장제 질서가 강조된 형태이다. 반혁명범죄와 일반범죄로 구별하여 처벌의 목적도 다르게 보는 북한 형법을 보면, 북한은 형법을 통해 개인의 보호보다는 체제 유지를 중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일반범죄로 분류되는 성범죄 중 대표적인 유형인 강간, 성추행, 성매매에 대한 북한 형법의 구체적인 규정 중 강간과 관련해서는 ‘강간죄(제319조)’, ‘복종관계에 있는 녀성을 강요하여 성교한 죄(제320조)’, ‘15살에 이르지 못한 녀성과 성교한 죄(제321조)’가 존재하는데, 모두 그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하여 규정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범죄는 성적불가침권, 즉 정조를 해치는 것으로 본다. 과거의 한국 형법에서도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으로 한정하고 보호법익을 정조라고 이해했던 것과 유사하다.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으로 제한한 것은 일견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를 정상적인 것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위험을 가져왔다. 북한이 해방 이후 추구해 왔던 여성상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심각한 경제난과 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변화되었다. 여성이 장마당 등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체로 등장하였는데,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맡으면서 북한 여성의 사회적 모습뿐만 아니라 인식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본래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의미는 부각이 되지 않는데, 고난의 행군 시기 식량난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개인’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성을 생계유지의 수단 또는 경제적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대두되었고, 동거 또는 사실혼의 증가나 성매매의 증가 등이 나타났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매매라는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 이에 대한 인식은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북한 형법 제정 당시 규정하였던 성매매 처벌 규정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매매의 존재는 사회주의 질서와 모순된다고 하여 1974년 북한 형법 개정에서 삭제되었는데, 고난의 행군 시기 극심한 식량난 등으로 발생한 성매매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북한은 2004년 형법 개정에서 성매매를 처벌하는 매음죄를 신설하였다. 그런데 북한 형법에서 매음죄는 성매수인을 처벌하지 않고 성매도인만을 처벌하므로,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에 나타난 여성의 성매매 증가는 여성에 대한 처벌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 고난의 행군 시기의 심각한 식량난으로 북한 여성의 모습과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음에도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으로 한정하고 보호법익을 성적불가침성(정조)으로 보는 것에 있어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2010년 남녀평등의 원칙을 다시 밝혔던 녀성권리보장법의 제정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에서 사람으로 변경하는 것은 성적불가침성(정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성적자기결정권은 북한법 체제가 비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근대법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북한 형법에서 강간죄의 객체를 변경할 수 없는 배경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성범죄 규정의 적용 현실을 보면, 북한 정부가 유엔에 보고한 성범죄의 수는 매우 적지만 북한이탈주민의 면접 결과에서는 북한에서 성범죄의 수가 매우 많다고 보고된다. 북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범죄는 문제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성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으며, 여성을 하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성범죄를 당하고도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북한 형법에서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에서 사람으로 변경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강간죄・준강간죄, 복종자간음죄 등은 반혁명범죄가 아니라 일반범죄에 속함에도, 이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보호나 가부장제 질서의 보호에 한정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북한 형법의 성범죄에서 추구되는 여성상은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받는 개인이 아니라 가부장제 질서 속의 여성이고, 이것은 사회주의 집단성에 기반한 북한법 체제 유지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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